그날 내가 갔었더라먼
“그날 내가 갔었더라면”
우리 엄마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날 2010년 2월 20일 토요일 구정 지나고 첫주말 그날 내가 갈거라고 했었더라면 우리 엄마는 친구집에 가시지 않고 딸을 기다리며 집에 계셨을 것이며 지금도 내 곁에 정신적 지주로 남아 계실 것입니다.
살아 오면서 정신적 지주 이셨던 우리엄마는 “못 오제”를 마지막으로 우리들 곁을 떠나셨습다.
언제나 힘이 되어 주셨던 엄마의 다정하던 목소리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들을수 없는 그리운 목소리가 되어 2년이 지난 지금도 목이 메이고 눈물 짖게 합니다.
그날 난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구정때 오빠들과 동생문제로 속상했던 이야기를 전화상으로 들으며 구정으로 인해 뻐근한 몸이라 산에 가고 싶은 내 욕심 때문에 엄마 “저 갈께요” 하지 않았던 그순간을 두고 두고 가슴치며 후회하는 통곡의 그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엄마 52세에 혼자 되시어 육남매 출가 시키시고 넷째오빠와 같이 사시다 조카들 등교길이 너무 멀어서 읍내의 아파트로 조카둘을 데리고 분가를 하셔서 시골집을 오가시면서 농번기에는 농사일도 도우시고 조카들을 돌보시며 지내시다 조카들 마져 다 커서 나가고 혼자 적적하게 지내시며 그나마 좀은 여류로운 노후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육남매의 외동딸인 난 친구처럼 자매처럼 평생 다툼한번 없는 다정한 모녀지간이었습니다.
직장에 애들 뒷바라지에 늘 바쁜 생활이라 자주 찾아 뵙지는 못했지만 전화로 대화를 많이 나누었고 가끔 찾아 뵐때면 밤새워 이야기꽃을 피우며 많은 정담을 나누곤 하였습니다.
늘 고맙다를 입에 달고 계시던 엄마!
자식된 도리로 당연히 해 드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맙다” “고맙다” 하시며 겸손하기만 하셨던 우리엄마셨습니다.
어린시절 풍족한 생활이 아니었지만 장사꾼들은 늘 우리집에서 자고 가는게 당연했고 친척들로 항상 붐벼서 우리끼리만 지낸 기억이 별로 없을 정도였습니다.
·1
뭐든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걸 좋아하셔서 어린마음에 “우리는 뭐 먹냐”고 불만이 들 정도로 음식들고 이집저집 참 많이도 들고 다녔던 기억이납니다.
먹을게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도 불러서 먹일 정도로 인심을 베푸시는 성품이시라 친구분들도 많고 이동생 이언니, 이딸등 따르시는 분들이 많은 탓에 장례식장에는 내내 울음바다였습니다.
엄마같은 엄마가 되려고 아무리 애써도 부족한 딸이기에 늘 정신적 지주셨고 존경의 대상인 어머니였기에 엄마를 보낸 2년이 지난 지금도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하고 가끔 눌러 보게 될만큼 믿어지지 않은 그날입니다.
가실려고 그려셨던지 부쩍 외로움을 타시는듯 하셨고 좋은것은 너 가져가라 하시면서 싸주시던 것을 이 아둔한 딸은 떠나시려고 그러시나 하는 의심도 해 보지 못했으니...아니 정신은 50인 나보다 더 말짱하셨기에 그런 의심조차 가지지 못했습니다.
엄마가 없는 내 삶을 생각할 여유도 주시지 않으신채 그렇게 쉽게 가실줄 알았더라면 좀더 자주 찾아뵐걸. 하루만 전화를 안해도 무슨일이 있냐고 하시던 그때의 엄마 !
지금생각하니 그렇게 바삐 가실려고 그려셨던가 봅니다.
그날 엄마는 그동안 자주 왕래하시던 친구분집에 가시다가 친구분집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셨던 모양이셨습니다.
그 아파트 주민에 의해 발견되셔서 인근의 병원에서 힘들었던지 진주의 대학병원으로 옮겨져서 많은 자녀들을 두시고도 혼자 쓸쓸히 돌아가시게 했으니 자식들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습니까?
폰도 주민등록증도 지니고 계시지 않으셨고 손지갑에 돈 14,0000원만 들어 있었을 뿐이어서 자녀들에게 연락할 길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인근경찰서에서 사진을 찍어서 들고 다니며 찾고 있는 것을 근처에 사시던 외숙모님께서 발견 하시고 시골의 넷째오빠집에 연락을 하셨고 엄마가 계시던 아파트에 전화를 해 보니 안 받아으셔서 병원으로 달려갔었다고 합니다.
어찌그리도 쉽게 정신줄을 놓고 가셨을까요?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그날입니다.
2
엄마가 가신 그날!
그동안 살아오신 엄마의 보금자리 베란다에는 엄마가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시던 화초들이 꽃을 허드려지게 피우고 있었고 밥솥에는 아침에 드시고 남은 밥이 남아서 따뜻했습니다.
늘 깔금하시던 성격이시라 온집안은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고 안방의 옥메트위에 이불이 덮인채 엄마의 온기가 남아 있어 근방이라도 “그새 왔구나” 하시며”웃으시며 나타나실것만 같았습니다.
평소에 많이 드시지 않아서 그리 쉽게 맥을 놓아버리셨는지?
고기보다 야채를 즐기셨고 조금만 드시고도 배가 부르다고 하시며 평생 소식하셨지요.
자기 먹는거 보다 남이 맛있게 먹는것에 만족해 하시던 엄마셨습니다.
한평생 일만 하시다 겨우 몇 년 일손 놓으시고 노인대학에 다니시면서 배움에 애착이 많으셔서 노인대학 졸업하는게 아쉽다고 하시며 책읽기를 즐겨하셨습니다.
18살에 시집오셔서 둘째 이셨지만 큰집살림까지 도맡아야 했고 집안의 대소사에 엄마가 빠지면 안될정도로 큰일을 많이 치루어 내셨습니다.
6.25사변에 아버지 군탈영으로 10년을 군생활을 하시는 바람에 혼자서 집안을 꾸려가야 하셨음에 그 고생을 책으로 쓰도 될만큼 많으셨습니다.
평소 왠만한 일에는 끄덕도 않으시던 강인하셨던 엄마셨지만 10년전 셋째오빠를 가슴에 묻으시고 자식앞세운 죄인이라 남몰래 혼자 밭에 가셔서 펑펑우셨다고 하시며 눈물지으시던 엄마!
그후로 노래를 부를수 없으셨다고 하시며 자식앞세우는 일 없어야 한다며 오래사는걸 걱정하셨습니다.
젊었을때 무거운 짐을 너무 많이 이고 다니셔서 늘 다리가 저리고 아프셔서 여름에도 맨살을 내 놓지 못하시고 겨울에는 옷을 겹겹이 입으시고도 다리가 시리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자식들에게 될수 있으면 부담주시지 않으시려고 무던히 애쓰시던 우리 엄마~ 아픈것이 얼마나 지겨우셨으면 “아픈것은 내가 다 할테니 니들은 아프지 말고 살아라”
자식의 아픔마저 끌어 안고 싶으셨던 자식 사랑이 속깊었던 엄마셨습니다.
3
저희집은 두매산골 교통이 너무도 열악한 산골마을이었습니다.
사천읍을 갈려면 20리길을 걸어야 했고 진주를 갈려면 열차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엄마는 진주장에 채소를 내다 파셔서 저희 6남매 공부를 시켜내셨습니다.
배움의 열정이 유난히 많으신 분이시라 자식들을 조금이라도 더 가르치기 위해서 자기 몸이 어스려지도록 일을 하셨습니다.
진주장엘 갈려면 산고개를 하나 넘어서도 10리길을 가야 기차을 탈수 있었습니다.
밤늦게 까지 채소를 다듬고 묶어서 준비해 놓으셨다가 새벽에 일어나셔서 그 무거운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보따리 하나를 손에 들고 산고개를 넘어서 기차를 타고 진주 역전옆의 골목의 상설시장,천전시장,중앙시장을 돌며 채소장사를 30년 넘게 하셨으니 진주장에 가서 “고추할매”하면 모르시는 분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몸을 혹사하셨으니 어찌 몸이 아프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그런 엄마덕분에 전 그시절 고등학교를 갈수 있었고 제가 고등학교때는 자취를 하다가 주말이면 집에 가서 바쁜엄마를 도우고 월요일 아침에 엄마랑 함께 등교할때면 딸이 들고갈 보따리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고생하시는 엄마를 조금이나마 더 도울려고 나와 내 동생은 “우리엄마 수월하게”하며 노래를 불러드리면서 참 많이 도우려 노력했습니다.
중 3때부터 오빠와 동생 사촌오빠까지 데리고 자취를 해야 했던 전 새벽에 일어나서 도시락을 4개씩 싸야 했고 밥이며 빨래며 어린 중학생이 하기엔 벅찼지만 어쩔수 없는 가정형편이었습니다.
자기고생보다 딸 고생 많이 시킨것이 ·마음에 걸린신다며 아들다섯하고 딸하나 안바꾸신다고 하셨을만큼 마음으로 의지 가지 하셨던 우리엄마... 딸 사랑이 특별하셨던 엄마셨습니다.
엄마가 날 공부시켜 주셔서 이 나이에 편하게 앉아 경리로 일하고 있다고 하면 얼마나 흐뭇해 하셨는지요.
잘 살아가던 딸이 하루아침에 빛더미에 앉아서 허우적거릴때 “살아만 있어라” “세월이 약이란다“ ”살다보면 좋은일도 있느니라“ 하시며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엄마~그때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애들 셋 반듯하게 키울수 있었던 것도 엄마가 제 곁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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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1등했다고 전화하고 장학금 받았다고 자랑하고 시험붙었다고 같이 좋아하고 좋은일이 있을때마다 좋아라 맞장구쳐 주시던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그래 니 집은 되는 집이구나”하시면서 힘을 불어넣어 주시던 엄마가 계서서 얼마나 힘이 되었었는지 엄마가 안계신 지금 더욱 절실해집니다.
엄마! 우리둘째딸 세무회계사 1차 최연소 합격했다우 엄마가 계셨더라면 얼마나 기쁘하실까? 합격소식 듣고 그날이 떠올라 가슴이 메여졌다우.
엄마가 계셨더라면 제일먼저 전화해서 자랑했을텐데 그럼 “잘했다”“잘했다”하시면서 좋아하셨을텐데...
이제는 하늘에 계신 엄마! 그래도 엄마는 늘 내 마음에 있으니 좋으시죠!
엄마랑 같이 해 보고 싶은게 너무도 많았었는데....
차사면 제일 먼저 엄마테우고 여행할거라고 하면 믿어주시고 좋아하시던 엄마~
엄마가 내 엄마라서 자랑스러웠고 내 가슴은 늘 엄마의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둘이서 여행도 한번 못해보고 엄마를 보내고 말았으니...엄마 죄송해요. 전 우리 딸들에게 엄마처럼 겸손하지 않으려 해요.
저처럼 후회막겁한 딸들을 만들지 않으려고요.
엄마!
엄마가 그날 절 좀 오라고 하셨^더라면 기꺼이 갔을 딸이었는데 왜 그때 오라고 그날 절 좀 불러주시지 않으셨어요?
그날 절 꼭 좀 오라고 하셔서 오빠들에게 섭섭했던 일 다 털어 놓으셨더라면 저도 기꺼이 엄마편이 되어서 위안이 되어 드려을텐데....
그럼 엄마와 저 좀 더 멋지게 이별을 나눌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통곡의 날을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요.
너무도 억울하게 떠나보내시고 후회하는 딸이지만 그렇게 다리가 저리고 아프다고 하셨던것을 생각하니 그 고통은 덜으셨을 것이란 위안으로 마음을 달래보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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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내가 걸아다니다 니들 성 안가시고 죽어야 할텐데...”를 입버릇처럼 하시더니
엄마 소원대로 된 셈이군요.
엄마가 떠나고 난 뒷자리에 이구동성으로 너희 엄마는 천당에 갔을거라고 하네요.
덕으로 살아오신 엄마의 생애를 이딸 또한 누구보다 높이 기리며..
그날 못한 엄마와의 이별을 이 지면을 빌어서 하고 싶습니다.
“힘든세월 너무 잘 살아내신 엄마! 고생 많으셨어요.
저도 엄마처럼 잘 살아내어 다음생에 다시 모녀로 만나서 지난 세월처럼 친구처럼 자매처럼 이생에서 못다 나눈정 그리고 둘만의 여행 꼭 나눌수 있도록 해요.
엄마가 내 엄마라서 너무 행복한 삶이었고 나도 엄마같은 엄마가 될수 있도록 늘 노력하며 살아낼께요.“
그날 내가 갔었더라면 하는 후회로 목이 메이고 눈물부터 앞을 가리는 그날
내가 갔었더라면 다정했던 엄마와의 이별이 달랐을 것이고 이별의 정담이라도 나눌수 있었을 것을 하는 간절한 마음에 “그날 내가 갔었더라면“ 하는 후회를 글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그날 제가 갔더라면” 하는 후회로 살아가는 딸이 하늘에 계신 엄마께 죄송한 마음을 띄워 보내며...